
실제 사건과의 연관성
평소 범죄 스릴러 장르를 워낙 좋아해서 웬만한 수사극은 빼놓지 않고 챙겨보는 편입니다. 그래서 ENA에서 <허수아비>라는 드라마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첫 방송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드라마는 가상의 도시 '강성'을 배경으로 펼쳐지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이 이야기가 완벽한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소름이 돋았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잔혹사, 바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고스란히 모티브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는 내내 단순한 픽션으로 치부할 수 없었던 이유는 드라마 속 에피소드들이 과거 뉴스에서 접했던 실제 인물들의 비극적인 삶과 너무나도 닮아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극 중 임석만이라는 인물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20년 동안 옥살이를 하는 과정을 보면서, 실제 사건의 피해자의 삶이 겹쳐 보여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소외되고 힘없는 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자비한 강압 수사의 희생양이 되어 청춘을 빼앗긴 모습은 보는 내내 깊은 탄식을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경찰의 조직적인 은폐로 오랜 시간 실종 상태로 남아야 했던 '화성 초등학생 실종 사건'을 모티브로 한 '혜진이 사건'의 서사는 유독 제 마음을 아프게 찔렀습니다. 어린 자식을 잃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울부짖었을 유가족들의 한 맺힌 슬픔이 화면을 뚫고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는 단순히 자극적인 연쇄살인마의 범행 행적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데 치중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잔인한 범죄의 틈바구니 속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하고 잊혀갔던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의 뒤틀린 삶을 아주 집요하고도 정성스럽게 조명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매 회차 전해지는 현실의 무게감은 대단했고, 화면 속 인물들이 겪는 고통이 마치 나의 이웃, 혹은 나 자신의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다가와 자꾸만 마음에 깊은 잔상을 남겼습니다.
사회적 메시지
저는 드라마를 볼 때 단순히 재미를 넘어 '이 작품이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화두를 던지고 있는가'를 유심히 살펴보는 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허수아비>는 공권력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어떻게 평범한 인간의 삶을 짓밟고 파괴할 수 있는지 그 추악한 민낯을 가장 적나라하게 고발한 웰메이드 사회고발 드라마였습니다. 극 중에서 권력과 승리를 위해 진실을 묻어버리는 검사 차시영과 과거의 잘못을 알면서도 묵인했던 세력들의 모습은 단순히 시대적인 한계로만 치부하기엔 너무나 조직적이고 악랄했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안위와 조직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시민을 범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과정은 스릴러라는 장르적 공포를 넘어선 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이 드라마가 던지는 핵심적인 사회적 메시지는 바로 '공소시효의 모순'과 '사법 정의의 부재'에 있습니다. 진범인 이용우가 뒤늦게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흘러간 세월과 공소시효 만료라는 법적 테두리 때문에 그를 법적으로 단죄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설정은 시청자로서 엄청난 무력감과 분노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더 화가 났던 것은 살인범뿐만 아니라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했던 공권력의 주체들 역시 그 어떤 제대로 된 처벌이나 진심 어린 반성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드라마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법이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왜 정의의 실현은 언제나 힘없고 가난한 자들에게만 이토록 가혹하고 느린 것인가?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왜곡된 진실 속에서 고통받았던 이들의 삶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사법 시스템은 과연 얼마나 투명하고 정의로운지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가해자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피해자들만 꽁꽁 숨어 살아야 하는 부조리한 사회 구조를 향해, 드라마는 매서운 회초리를 들며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해묵은 숙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었습니다.
결말 후기(스포주의)
마지막 12회 최종회 플러그가 뽑히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저는 한동안 거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통의 범죄 수사극이 보여주는 통쾌한 한방이나 완벽한 권선징악의 '사이다' 결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임석만이 뒤늦게 무죄 판결을 받으며 명예를 회복하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진실을 밝혀낸 열쇠가 다름 아닌 연쇄살인범 이용우의 과시욕 어린 자백이었다는 점은 정말 잔인하도록 현실적이었습니다. 경찰이 밝혀내지 못한 진실을 살인범의 입을 통해 들어야만 하는 사법부의 무능함과, 끝내 공소시효라는 벽에 막혀 '혜진이 사건'의 가해자들이 불기소 처분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모습은 가슴을 꽉 막히게 만드는 고구마 같은 현실 그 자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끝까지 인생작으로 꼽으며 완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연출의 묘미 덕분이었습니다. 다소 어두운 주제를 이야기해야 하는 드라마였지만 중간중간 약간의 유머를 잃지 않기 위한 연출이 있어서 크게 심장을 졸이며 보지 않았던 것 같아 좋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긴장감이 극에 달해 숨이 막힐 것 같을 때마다 툭 던져지는 수사팀원들의 인간미 넘치는 티키타카와 소소한 위트는 극의 완급조절을 완벽하게 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장르물 특유의 피로감 없이 인물들의 감정에 더 깊게 이입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강태주 형사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방송에 나가 은폐 가담자들의 실명을 폭로하며 "더 이상 허수아비로 살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은 비록 현실은 가혹할지언정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양심과 존엄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진짜로 인간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였습니다. 거대한 권력일까요, 아니면 진실을 외면한 채 침묵하는 우리들의 비겁함일까요. 타인의 조종에 움직이는 허수아비처럼 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늘 눈을 뜨고 진실을 감시해야 한다는 묵직한 여운을 남겨준 최고의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