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생 시절, 밤잠을 설치며 스크린 너머의 감정선에 온전히 몰입하게 만들었던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2017년 가을에 방영되었던 SBS 드라마 <사랑의 온도>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드라마는 제 마음을 유독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른을 앞둔 지금, 문득 쌀쌀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어김없이 노트북을 켜고 이 작품을 다시 정주행 하곤 합니다. 특히 한때 드라마 작가라는 빛나는 꿈을 품고 원고지 위를 서성이던 저에게, 주인공 이현수의 치열한 삶과 뜨거운 열정은 단순한 대리만족을 넘어 깊은 울림과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드라마 정보
이 드라마는 <닥터스>, <따뜻한 말 한마디>,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등 현실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대사로 수많은 마니아층을 거느린 하명희 작가의 소설 《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를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2017년 9월부터 11월까지 SBS에서 방영되었으며, 배우 서현진과 양세종이 주연을 맡아 방영 전부터 엄청난 화제를 모았습니다.
드라마는 온라인 동호회 채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드라마 작가 지망생 '제인'(이현수)과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는 유학파 요리사 '착한 스프'(온정선),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인물들이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며 서로의 사랑의 온도를 맞춰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당시 대학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며 매주 본방사수를 외치던 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하명희 작가 특유의 세련되고 문학적인 대사 톤은 영상 언어와 완벽하게 어우러져 한 편의 거대한 수채화 같은 영상미를 선사했습니다. 드라마는 단순히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춘들의 불안한 내면과 현실적인 고뇌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특히 소리를 지르거나 자극적인 사건을 배치하는 막장 전개 대신, 인물들의 아주 미세한 눈빛 변화와 숨소리, 대사의 행간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서정적인 연출 방식이 돋보였습니다. 그렇기에 종영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웰메이드 감성 로맨스 드라마의 대명사로 회자되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많은 이들의 마음을 다시금 두드리는 인생작으로 남아있습니다.
캐릭터 관계
<사랑의 온도>를 이끌어가는 핵심 재미는 네 남녀의 팽팽하면서도 애틋한 관계성에 있습니다. 중심축이 되는 이현수(서현진)와 온정선(양세종)은 서로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타이밍'이라는 잔인한 현실 앞에서 끊임없이 엇갈립니다. 스물아홉의 현수는 현실적인 안정감을 추구하느라 스물셋 정선의 직진하는 마음을 밀어냈고 뒤늦게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을 때는 정선이 프랑스로 떠난 후였습니다. 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각자 드라마 작가와 셰프로 성공한 뒤 재회했을 때, 이번에는 정선의 온도가 차갑게 식어있거나 현실의 짐이 무거워 현수를 온전히 안아주지 못합니다. 이처럼 서로를 갈망하면서도 감정의 주파수가 맞지 않아 애태우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제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이들의 사랑을 더욱 다채롭고 입체적으로 만드는 인물들이 바로 박정우(김재욱)와 지홍아(조보아)입니다. 명품 컬렉터 박정우는 현수의 재능을 알아보고 오랜 시간 그녀의 곁을 지키며 묵묵히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자처합니다. 정우의 사랑은 어른스럽고 단단하지만,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동생인 정선이 현수의 마음속 주인이었다는 잔인한 진실을 마주하며 깊은 갈등에 빠집니다. 반면 현수의 보조작가이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지홍아는 언제나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어야 하는 인물입니다. 자신이 짝사랑하던 정선이 정작 평범한 현수에게만 미소를 지어주자 강한 열등감과 질투에 사로잡혀 현수의 작가 데뷔를 방해하는 등 관계의 긴장감을 극대화합니다. 이 네 사람이 보여주는 각양각색의 사랑 방식은 '누가 옳고 그르다'를 떠나, 인간이 사랑 앞에서 얼마나 나약해지고 또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줬습니다.
후기
드라마를 보는 내내 제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단연 여자 주인공 이현수의 작업실이었습니다. 대학교 재학 시절, 저는 방송국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는 확고한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밤을 새워 시놉시스를 쓰고 공모전 마감일에 맞춰 대본을 수정하던 그 시절의 제 모습이 드라마 속 이현수와 너무나도 닮아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수는 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보조작가로 들어가 온갖 구박과 부당한 대우를 견뎌내면서도 결코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메인 작가로 데뷔한 후에도 제작사나 감독과의 의견 마찰로 대본이 난도질당하는 아픔을 겪지만, 자신의 작품과 캐릭터를 지키기 위해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입니다.
화면 속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대본을 집필하는 현수의 열정을 볼 때면, 한편으로는 가슴이 뜨거워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부러움이 밀려왔습니다. '나도 끝까지 버텼다면 저 자리에 서 있었을까? 내가 정말 드라마 작가가 되었다면, 현수처럼 부조리한 방송가 현실 앞에서 내 글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울 수 있었을까?' 하는 행복한 상상을 해보기도 합니다. 비록 지금은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현수가 대본 한 줄을 쓰기 위해 며칠 밤을 지새우며 고뇌하던 모습은 제 청춘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복사해 둔 것만 같아 마냥 남일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저에게 단순한 로맨스물이 아니라, 꿈을 향해 무모할 정도로 순수하게 달려갔던 제 젊은 날을 위로하고 안아주는 따뜻한 쉼터와도 같습니다.
드라마를 다 보고 역시 하명희 작가의 대사들은 화려한 수식어를 쓰지 않아도 인간의 감정 깊은 곳을 찌르는 날카로움과 다정함이 공존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일기장에 받아 적었던, 그리고 지금도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명대사 세 가지를 꼽아보았습니다.
"사랑은 둘이 하는 거야. 한 사람이 먼저 시작했어도 다른 사람이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에는 우선순위라는 게 있어. 네가 내 우선순위에서 밀린 건 미안해.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나한테 막 대할 권리는 없어."
"놓친 사랑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후회해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
이러한 명대사들이 겹겹이 쌓여있기에 <사랑의 온도>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빛나는 작품으로 제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