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정보
처음에는 그저 흔하디 흔한 고등학생들의 좌충우돌 학생회장 선거 이야기, 혹은 풋풋한 성장 드라마일 줄만 알았던 <러닝메이트>. 하지만 에피소드가 거듭될수록 살벌함이 느껴져 온몸에 소름에 돋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청소년기라는,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투명해야 할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 내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현실 정치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날것의 권력 투쟁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뉴스로 접하는 어른들의 정치판에 존재하는 모든 음모와 술수가 교실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더 잔인하고 밀도 높게 휘몰아칩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철없던 제 학창 시절이 겹쳐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과연 나는 저 상황에서 저들보다 고결할 수 있었을까?' 하는 서늘한 질문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드라마 <러닝메이트>는 영화 <기생충>의 공동 각본가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진원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라는 점만으로도 공개 전부터 엄청난 기대를 모았던 8부작 드라마입니다. 작품의 중심축은 한때 완벽한 모범생이었지만 버스 안에서의 불의의 사건으로 인해 순식간에 전교생의 비웃음거리이자 '발기남'이라는 치욕스러운 별명을 얻게 된 주인공 '노세훈(윤현수)'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바닥으로 떨어진 자신의 이미지와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세훈에게, 어느 날 차기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려는 이들이 접근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처음 세훈에게 손을 내민 것은 합창부장인 '양원대(최우성)'였습니다. 원대는 세훈에게 자신의 러닝메이트(부회장 후보)가 되어달라고 달콤하게 유혹하지만, 알고 보니 세훈은 그가 이용하려 했던 수많은 카드 중 '열두 번째' 대안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깊은 배신감과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세훈은 결국 원대의 라이벌이자 지역구 최고의 '핵인싸'로 통하는 기호 1번 '곽상현(이도윤)'의 러닝메이트로 합류하게 됩니다. 이처럼 드라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돕거나 학교를 바꾸겠다는 숭고한 목적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의 훼손된 이미지를 세탁하고 살아남겠다는 이기적인 욕망에서 출발합니다.
이 지점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일반적인 학원물이 보여주는 '정의로운 주인공의 승리'라는 공식을 초반부터 완전히 비틀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곽상현 캠프의 기호 1번과 양원대 캠프의 기호 2번이 부딪치는 본격적인 선거전은 고등학교 교실이 아니라 마치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축소판을 보고 있는 듯한 묘한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입시보다 치열하고 잔인한 고등학생들의 선거 전쟁이라는 로그라인처럼, 작품은 초반의 명랑한 분위기를 지나 중반부로 갈수록 걷잡을 수 없는 권모술수의 소용돌이로 시청자들을 빨아들입니다.
정치 핵심 요소
드라마에서 가장 소름 돋았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이미지 정치'와 '악의적 프레임 전쟁'이라는 정치적 핵심 요소의 등장이었습니다. 현대 정치에서 후보의 본질보다 중요한 것이 대중에게 보이는 '이미지'라는 사실을 고등학생들이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활용합니다. 주인공 노세훈이 선거에 나간 이유 자체가 이미지 쇄신이었던 것처럼, 이 세계에서는 진실이 무엇이냐보다 대중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모든 권력의 향방을 결정짓습니다.
이 요소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명장면은 바로 곽상현 캠프가 양원대 캠프의 등신대 훼손 사건에 휘말린 후, 양원대 캠프가 펼친 '침묵 유세' 장면이었습니다. 곽상현 측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양원대 캠프는 화를 내거나 거칠게 항의하는 대신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는 침묵 유세를 선택합니다. 이 장면을 보며 저는 온몸에 전율이 돋았습니다. 억울한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유권자들의 감성과 동정심을 자극하는 고도의 정치적 연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항해 곽상현은 평소의 다정하고 유쾌한 '가면'을 순식간에 벗어던지고, 자신들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노세훈을 거세게 몰아붙이며 가짜 뉴스와 사실 적시를 빙자한 명예훼손 등 언론플레이를 감행합니다.
내가 아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프레임을 씌우기 위해 눈빛 하나까지 바꾸는 괴물들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제 학창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무리 지어 다니며 은근히 누군가를 따돌릴 때, 직접적인 폭력보다 무서웠던 것은 '쟤는 이상한 애'라는 프레임을 씌워 침묵으로 고립시키던 행동들이었습니다. 드라마는 가짜 뉴스와 선거 홍보물 테러가 난무하는 과정을 통해, 순수한 청소년들이 권력의 달콤함에 중독되어 어떻게 다정한 얼굴 뒤로 칼을 숨기는 '괴물'로 변해가는지를 날것 그대로 폭로하며 높은 몰입감을 선사했습니다.
후기
이 드라마는 피 한 방울, 죽음 한 자락 나오지 않는 학원물이지만, 그 어떤 스릴러나 장르물보다 잔인하고 매서운 작품입니다. '정답이 없는'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가치가 무엇인지 고등학생들의 선거라는 신선한 렌즈를 통해 완벽하게 투사해 냅니다. 단순히 "애들 싸움이 어른 뺨치네"라며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교실 안의 가짜 뉴스와 선동, 프레임 전환에 너무나 쉽게 휘둘리던 눈먼 유권자 고등학생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사회 속 대중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기기 위해서 오랜 시간 쌓아온 우정과 신뢰를 단 한순간에 배신하고 도구로 전락시키는 모습은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이기적인 인간관계의 환멸이 드라마 속 교실에서 그대로 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세 치 혀로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후보자들의 최종 연설 단상 장면까지 보고 나면, 인간이 권력이라는 욕망을 쥐었을 때 어디까지 바닥으로 추락할 수 있는지를 목격하게 되며 깊은 씁쓸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이틴물 특유의 빠른 템포와 위트 있는 연출 덕에 지루할 틈 없이 흘러가지만, 그 이면에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벼려둔 웰메이드 정치 드라마입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잔혹한 경쟁의 규칙을 가장 먼저 배워버린 아이들의 서글픈 성장기, 혹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적나라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드라마였습니다.